(서울=우리뉴스) 방현옥 기자 = 어린 시절부터 서예술을 하며 교도소에서 서예로 봉사해 온 '난곡' 조영랑 선생(이하 난곡 선생)을 만나 선생의 인생에 귀를 기울였다.
故 용곡 조기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실 거 같아요.
난곡 선생 :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아버님이시자 스승이신 용곡 선생님께서는 '내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고 남의 자식을 가르칠 수 없다'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계셨어요. 아버님은 저녁 9시에 퇴근하시면 매일 우리 6남매를 한문과 서예를 가르쳐 주셨고 사람의 도리에 대한 교육도 함께 하셨어요. 매일 시험을 보고 ‘사랑의 매’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회초리로 훈계도 하셨지요.
광주소년원에서 청소년들에게 서예 봉사를 하셨고 작품 기증도 하셨어요. 청소년 선도위원을 하시며 교화를 하시는 아버지를 옆에서 뵈서인지 교도소가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어요.
부모님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녀를 위한 새벽 기도를 하시며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부모님의 기도 소리는 우리 가슴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풍경 소리와도 같았고 부모님의 실천적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르침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
어릴 때부터 서예를 접하셨네요.
난곡 선생 : 6살 때부터예요. 아버님 서실에서는 붓을 잡고 이모님의 국악원에서는 고전 무용을 배우고 오빠 화실에서는 그림을 배우며 예술 속에서 자랐어요. 그러다가 지원한 대학에 떨어지면서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어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서예로 최고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의 영향이 컸겠지만 서예가 제 맘에 항상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부모님과 함께 새벽에 일어나 가까이에 있는 절에 가서 예불을 모시고 정안수로 먹을 갈아 온 종일 글을 썼어요.
모두가 잠든 늦은밤 퇴근길은 아버지와 나의 발자국 소리와 어둠을 밝히는 달빛에 비춰진 두 그림자 뿐이었어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지금도 내 기억속에 선연히 남아 있어요.
어린 나이에 여성으로서 교도소를 찾아가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요.
난곡 선생 : 22세에 국전에서 입선해 기쁠줄 알았는데 제 마음에 만족감이 없었어요. 그리고는 사흘간 밥을 못 먹었구요. 상을 받거나 나의 명예를 높이는 게 저의 목표가 아닌 걸 깨달은 거죠. 그리고는 '이제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지?' 라는 고민에 빠졌어요.
'내가 좋아하는 서예를 계속하며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문득 서예를 통해 교도소 재소자 단 한사람이라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희망이 생겼어요.
다음날 무작정 광주교도소를 찾아갔는데 이미 다른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음날 비포장길에 완행버스를 타고 장흥교도소를 찾아갔어요. 어렵게 찾아가 '수용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싶어 왔다'고 했어요. 소신이 분명해 보였는지 교화과를 연결해 줬고 다행히도 아버님을 잘 아시는 교화과장을 만나 허락을 받게 됐어요.
1982년 4월1일이 장흥교도소 서예 수업 첫 날이예요. 그날부터 2018년까지 일주일에 2번씩 교도소를 방문했어요. 결혼 후엔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장흥교도소를 다녔어요. 아주 먼 길이었고 그 당시에는 뒤늦게 다시 만학을 시작해 여러 가지로 바빴지만 산후 조리할 때 한 달 정도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았어요.
그 세월 동안 저 혼자 한 일이 아닌거죠. 저를 격려하고 가정의 많은 일에 도움을 준 남편과 특히 아이들을 돌보시느라 광주에서 서울을 오르내리셨던 우리 친정 어머니와 함께 한거예요. 그러다 건강이 무리가 돼 2000년부터는 가까운 의정부 교도소로 옮겨 서예 봉사를 하게 됐는데 2018년 의정부 교도소가 구치소화 되면서 프로그램이 종료됐어요.
거의 40년을 한결같이 다니신 거네요.
난곡 선생 : 어린 나이에 내가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살아있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예치료'라는 새로운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됐구요.
2002년 이후로 '재소자와 함께하는 서예로 나 바라보기', '장애인(자폐성향 아동)과 함께하는 서예치료', 여수감자를 위한 '엄마마음 아이마음', 예술치료 '흰머리 검은 붓', 서예치료 '치매노인을 대상으로 한 서예치료', '먹빛 통해 내 마음 터 찾아가는 체험, '뇌졸중 좌측편마비 서예치료(시아버님)', '외상성 뇌손상환자 서예치료'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선생님 서예치료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난곡 선생 : 수용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도움이 되지만 어떤 상황이 되면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수용자들을 보면서 사람의 심리가 궁금해 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서예와 심리학을 접목시켜 ‘서예치료’를 연구하게 된거죠.
수용자 심리 검사에서 '반사회적 성향' 수치를 비교해 보면 서예치료를 진행한 후의 반사회적 성향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는 결과를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서예치료가 재소자의 반사회적 성향에 미치는 효과’라는 제목으로 석사 논문을 썼구요.
박사 학위 과정중 뇌졸중으로 좌측편마비가 되신 시아버님을 회상기법을 적용해 서예치료를 진행한 후 소논문을 발표했고 원광대병원 뇌손상환자들을 서예치료로 임상해 ‘서예치료가 외상성 뇌손상환자의 우울과 불안, 인지기능 및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어요.
서예는 나를 정화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정화해주는 이타적인 학문으로 성장하는 학문이라 생각해요. 우리 6남매가 모두 예술치료 즉 도예치료, 영상치료, 서예치료 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타인을 치료하는 예술치료로 도움을 주는 삶은 부모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9년에 두 번째 개인전 ‘심수쌍창전’을 개최하셨네요.
난곡 선생 : 화갑을 맞아 서예인생 40년을 기념하는 개인전 ‘심수쌍창전(心手雙暢展)을 개최했어요. 수용자와 함께하는 마음(心)과 서예를 써나가는 손(手) 이렇게 한 쌍이 함께하는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계획했구요.
하지만 수용자였던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뒤늦게 이해하고 혼자만의 개인전을 열었어요. 감사하게도 국회의원을 지내신 지인께서 대표로 작품을 함께 해주셨어요.
사회를 위해 봉사의 삶을 사셨는데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요.
난곡 선생 :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물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하기에 강이 되고 바다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오랜 세월을 붓을 잡으면서 낮은 자세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서예로 소통하고자 힘써 왔어요.
학문의 최종 목표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기에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옳은 일이다 생각한 일을 스스로 실천함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고 싶었구요.
누군가 40년간 작다면 작은 곳에서 오로지 수용자들을 위한 봉사를 했다면 이제 좀 더 큰 봉사를 하면 세상이 크게 변한다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와 2023년 2월에 있는 '한국서가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하게 됐어요.
그동안 저 혼자 작은 봉사를 해왔으나 이제 많은 초대작가 선생님들과 함께 서예인들을 위한 봉사를 하고 또 서예인들이 재능을 사회에 환원한다면 서예가들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정신적으로 더욱 부강해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난곡 조영랑 선생 프로필]
원광대학교서예학과졸업
예술치료학박사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한국서가협회 부이사장 역임
원곡서예학술상 수상
경북서예전람회 심사위원장 역임
전라남도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서예치료학회 회장역임
한국임상예술치유학회 부회장
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치료학과 외래교수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탠츠학과 미술치료전공 초빙교수역임
한국서예심리치료연구소장
난곡서예사군자문인화 연구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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